대한예수교장로회 은석교회

2026년 특별새벽기도회 6(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그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가치관도 이전과는 전혀 달라졌습니다. 형식과 제도라는 율법의 틀 안에 갇혀 있던 지식인 사울이 이제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유인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삶의 목표가 더 이상 이 땅에 속한 것에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 즉 ‘부활 신앙’에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도 바울에게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예수를 아는 지식입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8-9)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란, 영지주의가 말하는 ‘그노시스’(gnosis) 즉, 피상적이고, 문자적인 지식(Knowledge)의 예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영지주의자의 지식으로 아는 예수가 아니라, ‘에피그노시스’(epignosis) 즉, 더 넓고, 깊은 전인격적 관계 속에서의 예수를 만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영적 사귐’이라고 말합니다. ‘영적 사귐’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입으로는 말하면서도 정작 말씀을 듣지 않고, 말씀 안에서 예수를 만나지 않는다면 결코 진리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진리의 길입니다. 둘째,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예수를 내 안에 모시기 위해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모든 것을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긴다고 빌립보서 3:8에서 고백합니다. 즉, 예수님 만이 사도 바울의 삶에 최우선 순위이며, 최고의 가치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내 안에 모시기 위해서 사도 바울은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한 마디로 자신을 ‘내려놓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합니다. 즉, 예수 안에서 나는 죽고, 예수가 사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나를 죽여야 합니다. 육신과 탐욕의 욕망, 죄의 지배, 율법적인 모습과 형식적인 신앙생활…. 이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버리고, ‘오직 예수’가 나의 전부가 되어야 ‘바른 믿음’으로 자라나게 됩니다. 예수님처럼 사랑하고, 예수님처럼 섬기고, 예수님처럼 용서하는 예수의 향기 나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9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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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특별새벽기도회 5(그리스도의 부활을 깊이 생각하라)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20)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신앙’을 강조하고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는 자들이 생겨났고, 또한 죽은 자들의 부활을 부정하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부활 신앙’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전 15:3-8) 한 마디로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이라고 고백합니다. 사도 바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신앙’이 중요한 것은 그가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바리새인이었고, 율법주의자였으며, 죄인 중의 괴수였기 때문입니다. 하루하루를 죄와 사망의 쇠사슬에 매여 살았던 ‘마른 뼈’와 같은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나고, 주님의 음성을 들음으로써 그의 인생은 극적인 반전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2) 마른 뼈와 같이 죽어 있던 인생을 살던 바울이 생명을 얻게 되고, 자유 함을 얻게 된 것이 바로 ‘부활 신앙’입니다. 이 부활 신앙의 모형은 에스겔 37장의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 환상’에서 아주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겔 37:5) 즉, 말씀이 들어가니까, 살아났습니다. 죽음을 당한 자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주시니 그들이 살아나서 일어나 큰 군대를 이루었습니다(겔 37:7-10). 오늘 우리도 마른 뼈와 같이 죽어 버리고, 말라버린 껍데기 신앙이 아니라, ‘부활 신앙’으로 능력을 행하며, 열매를 맺는 생명력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9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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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특별새벽기도회 4(그리스도의 고난을 깊이 생각하라)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시편의 말씀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가 당하신 고난의 의미를 묵상하는 것은 나의 신앙생활에 큰 유익이 되며, 내 믿음을 더욱 든든하게 세우는 영적인 힘과 위로와 능력이 됩니다. 그리스도가 당하신 고난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5절의 말씀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1) 그리스도의 고난은 그분의 죄와 허물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허물과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바로 ‘나’라는 존재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찔리셨고, 상함을 당하셨으며,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고난 속에는 희생과 함께 사랑이 들어 있습니다. 그 희생과 사랑으로 인하여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우리가 나음 곧 구원함을 받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 가정이 나음을 얻고, 회복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고난 당하신 그리스도와 같이 희생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평화를 누리기를 바라십니까? 그렇다면 고난 당하신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합니다. 2) 그리스도의 고난은 ‘겸손’입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7) 예수님은 고난 중에도 변명하거나 핑계 대지 않았습니다. ‘침묵하시는 그리스도’. 오늘 우리가 배울 것은 자기 목소리를 크게 소리 내는 세상 사람들을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침묵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시를 바랍니다. 이것을 ‘겸손함’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와 같이, 고난 가운데 침묵하며 자신의 목소리는 내려놓고, 하나님의 음성에 집중하는 ‘겸손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9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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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특별새벽기도회 3(섬기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

지금 예수님과 제자들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위에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십자가를 지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예수님의 ‘거룩한 사역’(Mission)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뜻을 알지 못했고, 깨닫지도 못했습니다. 제자들이 원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그의 왕국을 세우는 것이며, 그 안에서 자신들이 권세와 부귀명예를 얻는 것, 즉 세상의 힘(power)이었습니다. 이것을 ‘욕망’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이런 탐욕과 욕망이 결코, 낯설지 않은 것은 오늘 많은 성도의 신앙생활이 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의 고난의 잔은 관심 밖의 일입니다. 그저 영광의 자리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높아지려고 합니다. 그 안에 교만과 이기심만이 가득합니다. 이것이 그들의 가치 기준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향해 이렇게 요구합니다.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막 10:37) 오늘 우리도 고난보다는 영광을 탐하지는 않습니까? 낮아지기보다는 높아지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말씀을 듣고 알기는 많이 알지만, 그 말씀대로 살려고 하기보다는 내가 아는 말씀의 잣대로 다른 사람의 신앙을 평가하고, 비판하지는 않는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의 생각을 단호히 물리치십니다. 그들의 생각과 그들의 마음이 잘못되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 세상의 가치 기준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막 10:43-44)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가치 기준은 낮아짐입니다. 이것을 ‘겸손’이라고 말합니다. 겸손한 자가 은혜를 받습니다. 겸손한 자를 주께서 높여 주십니다. 베드로전서 5:5-6의 말씀입니다. “…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5-6) 서로 높아지려고 아우성치는 제자들에게 ‘겸손하라’고 말씀하신 주님께서 다시 한번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거룩한 사명에 대해서 가르쳐 주십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왔다”는 이 말씀이 우리의 삶의 기준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9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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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특별새벽기도회 2(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가 예수를 깊이 생각할 때, 가장 먼저 살펴볼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聖)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나타내는 말씀이 요한복음 1:1의 말씀입니다. 태초에 말씀(로고스)이 있었다(Ἐν ἀρχῇ ἦν ὁ λόγος, 엔 아르케 엔 호 로고스) 말씀(로고스)은 곧 하나님이셨다(θεὸς ἦν ὁ λόγος, 데오스 엔 호 로고스) 태초에 하나님은 ‘말씀’(다바르, דָּבָר)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말씀’이 어두움을 몰아내고 이 땅에 빛을 만드셨고, 말씀으로 천지 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말씀은 곧 어둠과 거짓을 몰아내는 빛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바로 이 빛과 생명이신 말씀이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생명이신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며,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5)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말씀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가 잊고 있었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말씀’을 선포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어둠에 속한 사람들은 빛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아니 오히려 자기들의 어둠(죄)을 감추고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심지어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은 30에 팔아버리기도 하였고,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 주면서 자신의 피 묻은 손을 씻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기까지 했습니다. 이처럼 어둠에 속한 자는 감추는 자요, 숨기는 자입니다. 이것이 어둠의 속성이요, 본성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 사람들에게는 그 말씀이 생명이 되었고, 빛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상처받고 소외된 영혼에게는 위로와 소망이 되었으며, 죄와 사망에 매여있던 자들에게는 ‘빛과 생명’이 되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를 깊이 생각하고, 그 말씀 안에 거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는 새해를 시작하며, 태초부터 계셨고, 모든 것을 창조하셨으며, 생명과 빛이 되시고, 우리를 위해 기꺼이 이 땅에 오신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분을 우리의 구주로, 우리의 삶의 빛으로 온전히 영접하고, 그분의 은혜와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매 순간 말씀이신 예수님을 묵상하며 그분과 동행할 때, 우리의 삶은 참된 의미와 희망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2026년 새해 첫 주간, 새벽을 열어가는 우리에게 말씀이 내게 찾아와 주시고, 임재하는 거룩하고 복된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9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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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특별새벽기도회 1(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 3:1)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2026년, 한 해는 예수를 깊이 생각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진짜 ‘예수의 제자’의 삶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름답고 높게 세워진 교회라도 예수가 없는 교회, 말씀이 없는 교회는 죽은 교회입니다. 성도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가 없는 성도, 말씀대로 살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죽은 믿음’이요, ‘가리지 신앙’입니다. 야고보서 2:17의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 우리가 예수를 깊이 생각하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죽은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산 소망을 내 안에 품고 살고, 살아있는 신앙생활을 하기 위함이에요. 예수를 오래 믿었고, 교회를 오래 다녔는데도, 많은 사람이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해요. 예수가 없기 때문이에요. 예수가 없기에 사람들은 성경 말씀을 읽어도 깨닫지 못하는 거예요. 예수가 없는 사람의 신앙생활의 특징이 있어요. 신앙생활을 율법적으로 하는 거예요.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자기만을 위한 신앙생활을 하는 거예요. 예수님께 찾아온 유대인의 지도자요 바리새인인 니고데모가 그런 사람이에요. 자기 자신은 성경을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심지어 다른 사람에게 성경 가르치는 일을 하지만, 정작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어요. 그런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말씀 안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도록 가르쳐 주셨습니다(요 3:3-5). 3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4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에게 주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는 말씀을 형식적이요 율법적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 안에 감춰진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발견하는 소망의 한 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1) 예수를 깊이 묵상하면, 신앙생활에 영적 힘이 넘치게 됩니다. 말씀이 곧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2) 예수를 깊이 묵상하면, 그 이름 ‘예수’가 나의 구원의 능력이 됩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세상은 다른 곳에서 ‘희망’을 찾고 ‘구원’을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찾는 기쁨과 평안의 길은 오직 ‘예수’ 안에 있음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2026년 한 해는 말씀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고, 그 말씀을 깨닫는 기쁨이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내게 주신 말씀을 붙들고 늘 깨어 기도하며 주님과 같이 사랑하며 섬기는 복된 그리스도인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9 months ago
킹덤 브릿지 미션

일어나 그 땅을 다니며 그림을 그려 오라

가나안은 이미 주어졌다. 전쟁도 끝났고, 하나님의 약속도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여호수아 18장을 열면 의외의 장면이 등장한다. 땅은 남아 있는데, 사람들이 움직이지 않았다. 머뭇거림, 익숙한 자리, 아직 정리되지 않은 두려움이 이스라엘의 발걸음을 붙잡고 있었다. 그때 여호수아는 기도만 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더 기다리라고도 하지 않는다. “너희는 일어나 그 땅을 두루 다니며 그림을 그려 가져오라.” 이 말씀은 ‘계획부터 세우라’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은 숫자나 전략 이전에 믿음으로 미래를 바라보는 시선을 요구하신다. 아직 경계가 확정되지 않은 땅을 걸으며 “여기가 우리의 다음 걸음이 될 수 있다” “여기에도 하나님의 일이 시작될 수 있다” 그렇게 약속을 먼저 보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2026년을 앞에 두고 있다. 사역의 방향은 보이지만 모든 답이 주어지진 않았고, 모든 길이 명확하지도 않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시점에 이렇게 말씀하신다. “불안 속에 머물지 말고, 과거의 방식에 안주하지 말고, 내가 이미 준 땅 위에 너의 믿음의 그림을 그려 가져오라.” 킹덤브릿지미션의 다음 계절은 갑자기 떨어지는 기적으로 시작되지 않는다. 기도로 걷고, 말씀으로 기록하고, 순종으로 선을 긋는 시간 속에서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완성되어 갈 것이다. 2026년은 아직 걸아가보지 않은 날들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믿음으로 걸어가라 하신다. 믿고 걷는 사람이 미래의 지도를 완성한다. 멈춰 서 있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걸으며 그림을 그려 가져오는 공동체로 나아가야 한다. “일어나, 두루 다니며 그림을 그려 가져오라.” 2026년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이미 시작되었다.
10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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